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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우리에게는 모티브가 존재할 것이다. 이데아의 동굴 우화와 같다. 우리를 죄인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 모두는 「새장의 숲」이라는 동굴 속에 묶여있었다. 우리는 이 꿈을 꾸고 있는 주체, 「라파엘」의 무의식이 창조해낸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는 그의 현실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난 개체가 아니라면 보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한 것을 사고 실험만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내가 사 백 년 간 관찰한 라파엘의 지적 수준은 단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인물상을 이렇게나 쏟아내어 만들 수 있는 인물까지는 되지 못 한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에게는 이데아가 존재할 것이다. 살아있었던 ‘라파엘’의 주변 인물, 우리의 모습과 사상, 주어진 소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살아있는 주체들, 이 숲에 존재하는 모든 거짓의 근간이 되는 진실이 현실에 존재했으리라.
나의 소명은 지식이라는 개념과 접해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개념과 사상, 법칙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서, 오로지 그것에서만 행복을 누린다. 라파엘은 나에게 모두에게 다정할 것을 소명으로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가장 큰 불찰이었다. 나의 다정함을 숙명이 아닌 나 개인의 호의와 양심에 맡기고 만 것. 이성적으로 습득한 교양과 예의를 통하면 「내」가 그가 창조한 흐름 밖으로 튀어나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것.
삶이란 결국 행복의 문제이며 나의 행복은 타 개체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그는 어찌하여 이처럼 불경한 창조물을 만들었는가. 「나의 이데아」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를 참고하여 재창조한 내가 그를 배신할 일이 없다고 믿었는지는 아마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을 고려해 봤을 때 이제는 영영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거 후회 안 합니까. 나야 원래도 당신네 「꿈 정류장」이 박살나길 바란 사람이지만, 댁한테는 고향 아니오. 당신의 세계이자 질서였던 공간을 이렇게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어 놓으면…….”
그는 새장의 마지막 이방인이다. 타인의 꿈속을 돌아다니는 마법을 시그니처 마법으로 삼았던 자로, 무언가 잘못되어 꿈속에 영영 갇혔다고 했다. 그는 라파엘과 현실에서 알았던 사이라고 했고, 그 특이점 때문에 내가 새장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도와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회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를 찾았다. 그것은 필연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우연이었다. 내가 연회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새장으로 돌아와 있었다는 것은.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라파엘을 살해했다. 루시드 드리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존재를 어그러뜨릴 만한 힘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 내가 지옥까지 당신을 추격할 테니.”
“이제 슬슬 형제와는 작별을 할 시점이 왔어. 선생의 악역을 기대하지.”
“…… 선생님, 정말 이대로 괜찮아? 이렇게 많은 동물들을 죽이고, 신을 죽이고. 난 물론 선생님에게 새장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렇게 많은 내 동포를 죽여 달라는 말은 아니었어.”
“완전히 학살이군. 거 당신 제자가 사랑을 모른다고 했다는 말, 부정하긴 어렵겠소. 이래서야 누가 여기가 숲이라고 생각하겠어. 도살장. 그 말이 더 어울리는 꼴이 됐어.”
반발은 가히 대단했다. 그러나 그것을 전쟁이라 표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 하다. 신을 살해하겠다는 공언 이후 내게 반발한 수많은 동물의 사체를 쌓아두고도 나는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러리라 짐작했다. 라파엘의 정신연령은 어림잡아 열 살이었고, 그런 아이가 상상 속에서 설정한 최상위 포식자란 터무니없는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새장에 통용되는 유일한 법칙은 그의 상상과 무의식이었기에.
세계의 중심축이었던 그가 사망하자 새장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붕괴했다. 이방인의 도움은 그 무너져 소멸해가는 세계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 필요했다. 그는 나와 미리 거래가 끝이 나있었고, 약속대로 살아남은 제자 셋과 나를 서로 다른 꿈 정류장으로 이동시켜주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시기로 했으니 작별인데, 여러모로 조심하시오. 당신 죄는 반드시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어. 당신이 살려둔 제자 셋 중 적어도 하나 둘 쯤은 당신 원망을 할 거요. 자신의 동포를 당신 손에 그만큼 잃었으니 당연하겠지. 추격도 있을 수 있을 테고. 일부러 내가 멀리 떼놓긴 했지만, 뭐, 아무리 꿈 속 세계가 넓다고 해도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칠 수도 있잖겠소. 모쪼록 몸조심해요. 당신은 라파엘이 설정한 영역 내에서나 최상위 포식자였던 거지, 다른 개체의 꿈속에선 다를 테니. 더군다나 무엇이 어떻게 존재할지 모르는 세계니까. 꿈의 가능성은 무한하기에.”
“글쎄, 그들을 살려둔 것만으로도 나는 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속죄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동포가 아닌 내가 이만큼 다정했으면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창조한 이는 내게 다정할 것을 숙명으로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길은 아니었던 셈이다.
“호전적인 양반이로구만. 그렇게 살아도 쓸쓸하지 않겠어요?”
“전혀. 무어 쓸쓸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주어진 소명대로 살아갈 뿐. 타 개체에 대한 사랑이 나의 소명이 아닐진대.”
그저 나는 앞으로 펼쳐질 삶,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어가는 이 수많은 개체의 꿈속이 기대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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