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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자랑에 자랑을 하시니, 거 형씨가 걱정하던 것과 달리 좋은 곳에 정착했음은 알겠소. 그렇지만 동시에 변함없이 매정한 구석이 있으시구만, 그래. 이름이 없어서 0번을 자처했다고. 그럼 아무도 모르고들 가는 거요? 당신이 무엇이고, 이름은 뭐고,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고, 그런 것들. 약은 건 여전합니다, …… 씨.
유세프 씨는 변함이 없네.
여기는 꿈속이고, 당신의 꿈은 내가 통제하고 있으니까.
이상하네.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당신이 사라지진 않아.
그야 타인이 일러주고 나서야 비로소 자각한 건 자각몽이라 할 수 없으니까.
왜 그런 걸 그들이 알아야 해?
몰라야 할 건 또 뭐요.
남의 일이라고 굉장히 쉽게 말하는구나.
거 다 댁 좋으라고 하는 충고요. 그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 토끼 양반은 좀 알아야지 않겠소. 불공평하잖어. 당신은 수명대로 다 살아도 그 토끼보다 일찍 죽을 거고, 적어도 가기 전에 이름은 알려주고 가야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당신의 유년시절부터 천천히.
유년시절? 내게 그런 게 있어? …… 씨,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당신의 눈에 비치는 나는 대체 어떤 존재야?
악몽이지. 내가 태어나 단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는 가장 거대한 악몽.
그건 내가 「소뵈르 샬레」라서? 그 사람의 유년시절은 나의 유년시절인가.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게 됐잖소. 당신이 그를 살해했을 때부터.
안타깝지 않았던 건 아니야. 나는 「소뵈르 샬레」가 어디를 가나 함께 있었어.
그의 그림자였으니 그러시겠지.
거울이나 유리창, 햇빛이 나는 곳. 어디든 내가 있었어. 나는 그의 그림자였으니까. 그가 비춰지는 곳엔 내가 있었고, 그가 나를 돌아보면 나도 그를 바라보았지.
그의 모든 유년시절을 지켜보았겠고.
태어났을 때부터 파우스트의 마법으로 그와 ‘분리’되기 전까지, 그 모든 것을. 그가 자연재해로 인해 부모와 떨어져, 어린 동생 토마 샬레 하나만을 보고 살았던 것이나. 어린 토마가 역병으로 죽어가던 모습이나.
하얀 여왕의 병사들이 그의 시신을 그에게서 빼앗아가는 장면도 잘 기억하고 있고?
그들이 「소뵈르」에게 단 하루, 토마의 장례를 치를 시간을 내어줬던 것도 물론.
그 때 그가 무언가를 먹었다지 않았소?
토마의 심장을.
무슨 이유로?
장례가 끝나면, 정부에 그의 시신을 반납해야 했으니까. 역병이 걸린 시신을 빈민가 골목에 방치하는 건 좋지 않지. 그리고 빈민가 출신의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던 「소뵈르」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동생의 마력코어(Heart) 뿐이었어. 그걸 취하려면 동생 토마의 심장을 먹는 수밖에 없었고.
그건 금기였겠지. 당신 조국에서도.
물론. 그리고 도박이었지. 역병에 걸린 시신이었으니까.
들켰나?
들켰어.
어떻게 살아남았지?
어린 이사벨의 도움으로. 그리폰 남작의 딸. 그 때엔 미치기 전이었지.
과연, 빈민가 출신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그의 후원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거로구만.
그 후로는 지켜보면서 쭉 마음이 아팠어.
빈민가의 아이가 귀족가의 후원을 받아먹으려면, 아무래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겠지.
그럴수록 「소뵈르」는 독해져 갔고, 죽은 토마나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어.
마법은 꽤 잘 했다지 않았소?
그랬었지. 재능도 좋았지만, 두 사람 분의 마력을 가졌으니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그를 충족시켜주진 않았군.
마법은 도구였으니까. 우선은, 재해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마법이 필요했고.
어째서?
바다를 건너든 사막을 건너든, 건너려면 국경결계를 녹여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탈리 호를 만들었나? 국경결계를 녹이는 배.
맞아. 당시의 연인이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지. 브릿 사막보단 바다가 건너기 편하기도 했고.
도망쳤나? 리히트 대학에서.
미쳐서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한 이사벨 그리폰에게서 도망쳤다고 봐야겠지.
돌아갔을 땐?
아무도 없었어. 부모님은 사라진 우리 형제를 찾느라 일찍 돌아가셨고, 일가친척도 흩어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가.
그게 마지막 스위치였군. 그가 미치기 위한.
그의 행복은 부모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망자들에게 있었으니까.
그 자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사자소생 마법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가 그거였나.
토마든 부모님이든, 사실 아무라도 좋았어. 유년시절의 행복을 되살리고 싶어 했지.
그러기엔 가지고 있는 마법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응, 그래서 해적단을 결성했어. 주된 목적은, 각지의 「마법」의 약탈. 「마법사」의 납치 및 실험체 조달.
하하, 그 시절의 해적선은 바다에 떠다니는 실험실이라고 봐야 할 지경이었겠군.
보고 있기 참혹할 만큼이나 많은 실험체들이 죽어갔어. 주로 어린아이들.
왜 하필?
그의 기억 속 토마 샬레는 어린아이였고, 어른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 않았으니까.
…… 씨가 잘려 나온 건 그 때 쯤의 일이었던가?
장소는 마법사 요한나 파우스트의 연구실. 그가 연구하던 ‘그림자를 잘라내는 마법’에 당했지.
그는 당신에게 「토마」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에게 있어 나는 자신의 그림자라고 하기 보다는, 「토마 샬레와 가장 유전적 형질이 가까운 실험체」에 불과했으니까.
당신은 나탈리 호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유년시절을 공유했다는 것은, 그가 마법을 학습하고 연구한 기억도 공유한다는 말이잖소. 필연적으로 본체인 「소뵈르」가 구사하는 마법은 당신도 구사할 수 있었을 테니 도망치기도 쉬웠겠지.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본체를 연민했어.
그건 그림자들의 특성인가.
하하, 그럴지도. 어쩔 수 없는 걸지도. 왜냐하면 나는 그의 모든 불행을 알고 이해하며, 그가 그 순간 느꼈던 그 모든 참혹한 감정을 함께 겪은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런 미쳐 돌아가는 집단이 오래 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과거의 선상반란은 실험체들의 반란이었겠군.
중심은 「제임스 후크」였어. 엄연히 따지자면 실험체에서 벗어난 존재였지. 실험 도중 죽지 않고 무사히 열일곱 살까지 성장한 몇 안 되는 개체였거든. 「소뵈르」가 특히 싫어하는 아이이기도 했어.
꽤나 거셌던 모양이오, 반란의 바람이.
「소뵈르」가 그 아이에게 잡혀죽느니 내게 죽겠다 나올 만큼. 그 애들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소뵈르」의 마법은 대다수 미리 봉쇄를 해둔 상황이었어. 이길 수 있는 수가 없었지.
그래서 죽였고.
응, 나는 「소뵈르」에게 약했으니까.
그렇게 하면 당신도 죽을 줄 알았고.
물론. 나는 「소뵈르」와 통각을 공유했으니까.
그렇지만, 「소뵈르」의 시신은 거울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당신이 본체가 되어버린 거로군.
그림자가 본체를 죽이면 본체가 그림자가 되는 규칙이었던 거야. 그 마법은.
요한나 파우스트가 그걸 가르쳐주지 않았나?
파우스트의 마법을 약탈했을 때 그는 그 연구실을 비운지 오래된 것 같았어. 연구실은 아주 낡았고, 낡은 밧줄이나 늘어져 있었지.
아하. 그래서 몰랐던 거군. 「소뵈르」도 당신도. 그림자를 잘라내는 마법 같은 것은 학계에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도 많이 곤란한 눈치였어. 그 애가 미워해야 할 상대는 같은 실험체였던 내가 아니라 이제는 그림자로 복속된 「소뵈르 샬레」일 텐데.
그 후로도 해적단이 유지된 건 당신의 의지였나?
반은 나의 의지고 반은 「제임스」의 의지였지. 「소뵈르」의 유년시절을 떼고 생각하면, 난 평생 해적선 밖에 모르고 산 사람이야. 갈 데가 없었고, 해적단이 유지되었으면 했어. 그 애는 그 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고.
그렇게 10년을 갔던 거로군. 당신은 나탈리 호에 마력을 공급해서 배를 움직이게 하고.
새로 선장이 된 「제임스 후크」는 해적단을 운영하고 말이야. 맞아, 그런 식으로.
결국 둘 사이가 틀어진 건 뭐, 물을 것도 없겠군.
그 애의 실수로 선원이 죽었으니까. 처음부터 조건이 그랬어. 나는 그 애에게 해적단을 유지해주면 나탈리 호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그 애는 그들을 지키고 해적단을 유지하는 데에 실패했어.
거 내 기억에 생각보다 크게 싸우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긴 하는데.
하하, 그렇긴 했지. 싸워봐야 뭘 해? 그 애는 필연적으로 같은 실험체 출신인 나를 연민했고, 어차피 「제임스 군」은 내게 손 하나 못 대는데. 국경결계를 녹이는 마법을 구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
거꾸로 말하자면 국경결계 정도의 결계를 칠 수 있다는 의미지.
해체 수순은 생각보다 평화로웠고, 뭐, 그건 당신도 잘 기억하는 부분이겠네.
맞아. 그리고 결국 당신은 나탈리 호에 남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 그 이후로는 어떻게 사셨소?
나탈리 호를 수몰시켰어. 바다 속에. 오즈에 상륙했고, 그 후로는 떠돌이로 살았어.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네.
거 낯짝도 두껍소. 「해적 소뵈르 샬레」에게 붙은 현상금이 얼마인데. 마법사를 납치하고 마법을 약탈했다면 당시 해적단의 주 무대는 오즈였겠지. 마법대국.
하하, 그래서 쫓길 땐 실하게 쫓겼어. 오즈는 만만치 않지. 마법대국인 만큼, 마법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이미 연구가 끝난 나라야. 나를 연민했던 「제임스 후크」나 대다수 마법에 무지했던 해적단을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란 말이야. 오즈의 사냥꾼들은.
그러다 들어갔소? 거울이라면 학을 떼던 양반이.
우연히 내 망토 주머니 안에 초대장이 들어있었고, 난 거기에 거울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저 길이 하나로 쭉 이어져 있다고 착각했지. 쫓기면 착시도 심해지거든.
거울이란 걸 알았으면 못 들어갔을 텐데.
물론. 내 그림자가 누구인데. 내가 죽여서 거울 속에 복속시킨 「소뵈르 샬레」가 거기 있는데, 무슨 염치로 거길 내 발로 들어가.
본능적 공포로군. 도플갱어에 대한.
「제임스」도 늘 시달리던 공포지.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도착한 셸터에선 퇴실을 할 수 없었겠군. 돌아갈 때도 반드시 거울을 통과해야 하니까.
하하. 그렇다고 버니 씨에게 무섭게 쫓아와달라고 할 순 없잖아.
별로 무섭지도 않을 테고 말이지.
맞아, 버니 씨는 지나치게 귀여우니까. 그리고 좋은 토끼고.
그렇게 꾸물대는 와중에 세계가 없어져서 좋은 구실도 생겼겠고.
그건 당신 소행이지?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 그렇다고 당신네 선왕을 죽였다는 소린 아니지마는.
뭐가 어찌되었든 일조했을 테니까. 그 점은 고마워. 덕분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착했어. 태어난 순간부터 바다 위를 부유하던 그림자가 말이야.
인간으로서 토끼 굴에 정착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원.
유세프 씨가 그 난리에서 생존해준 건 고마운 일이야. 앞으로 어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셸터에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고 치고. 당신은 꿈속에 갇힌 거지?
글쎄. 뭐라도 하면서 살겠지. 삶에 미련도 없고, 적당히 꿈속이나 부유해 볼까 생각 중이오. 거 별로 친하진 않았소만은 나이가 드니 이제 옛 동료들이 그리워지고 그러더라고. 형씨가 죽기 전까지는 가끔 들르고 그럴 테니까 웬만하면 수명만큼은 살다 가요. 거짓말도 적당히 하고. 그러다 또 아무도 안 남으면 허망하지 않겠소.
하하, 괜찮아. 사람은 없어도 대쪽같은 토끼는 계속 있어줄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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