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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양과 함께 늘어지는 저녁의 소리는 무엇이든 싫었다. 하교를 위해 학교 정문을 벗어나면 으레 들려오는 또래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 집에 들렀다가 어디 놀이터 앞에서 보자, 그런 파릇파릇한 약속들. 제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행복감이 묻어나는 음색으로 아이를 부르는 보호자들. 여름방학이 시작할 무렵이면 정문 앞에 꼭 값싼 아이스크림을 팔러 오던 노점상인의 목소리. 매미 소리. 멀리서 뻗어오는 바람소리, 파랗게 거리를 메운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보도 곁을 지나가는 자전거 벨소리. 골목에 접어들면 줄어드는 발소리. 커져가는 심장소리. 근교 공원을 가로지르면 공원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원형 시계, 정각을 알리는 멜로디. 도시에 사는 새들이 일제히 날아가는 소리. 나보다 조금 더 어린 여자아이가 골목어귀에서 우는 소리. 느려져 가는 발소리. 심장소리. 우리 집 현관이 내 비좁은 시야 안으로 들어오면 돌연 목 끝까지 턱 차오르는 두려운 마음의 소리.
엄마, 돌아오셨겠지?
상, 못 받은 것 때문에 오늘도 화가 나 계시면 어떡하지.
바이올린, 다시 사주시면 좋겠다.
다시 사주실까? 오늘 당장 비스트리츠로 날 쫓아내려 드시면 어떡하지?
이번엔 며칠이나 엎드려서 빌면 용서해주실까. 일주일? 한 달?
그렇게 한참을 기나긴 담벼락의 그림자 속에 주저앉아 생각의 타래를 더듬다 보면 내 안에서 역류하는 부정적 감정을 덮을 소리를 원하게 되곤 했다. 바이올린. 나의 이 극심한 우울, 끔찍한 본질을 위로하는 그 현의 소리가 없이는 내가 당장 내 안의 어떤 불같은 무언가에 삼켜져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또 며칠이고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간곡히 매달려 애원해대곤 했다. 잘못했다는 말이 무슨 대단한 마법의 주문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하면서 내게서 그것만은 빼앗아가지 말아달라고―내 목을 바싹 움켜쥐고 들어오는 죽음이, 그것에 직결된 우울과 무력감이 무섭다고― 그녀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렇게 몇 날 며칠 밤을.
2.
“그래서 지금은 행복해?”
“바이올린 마음껏 하고 있으니까, 물론.”
“…… 그런 것도 바이올린이라고 치는구나, 너는.”
“아?”
“몇 번을 봐도 적응 안 돼. 사람을 잡아먹는 것 같아, 그거.”
그는 각인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느리게 인형의 목덜미에 박았던 고개를 쳐들었다. 시신의 목에는 쉽게도 자국이 남았고 살짝 늘어진 타액은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다 이내 조명 불빛에 녹아버리듯이 끊어졌다. 비스트리츠의 악마. 혹은 뱀파이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적당한 손길로 하나로 모아 묶던 그의 입술 사이로 돌연 툭 터져 나온 단어였다. 나루카미 테츠야는 눈만 몇 번 깜빡이고 대답은 않았다. 이그나츠 아델하이트는 찬찬히 몸을 일으켜 제 각인이 들어간 시신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어둑한 조명 아래,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칼은 여전히 핏빛이었다.
“아델하이트 가의 시체인형사들을 지독하게 쫓아다녔던 굉장히 오래된 별명. 그 산간 지역의 뱀파이어 전설은 우리 가계의 사람들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논문이 있었을 정도야. 그런 거 연구하는 사람들 있잖아. 풍속이나 민담 같은 것들.”
“아. 알 것 같네. 왠지 그래, 응. 뭔지 알 것 같아. 사람을 물면 새하얗던 머리칼이 끝까지 붉게 변하니까 피를 섭취했다고 생각했구나, 그 옛날 사람들은. 피를 섭취했기 때문에 붉게 변한다고.”
비스트리츠의 악마. 뱀파이어. 혹은 그에 준하는 악마적인 수식어들. 시체인형사의 부모들이 가지는 자식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이그나츠 아델하이트의 어머니가 아들의 음악을 짓밟고 싶어 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소년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악마’로 태어난 아들이 그런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이 예민해지는 행위를 전문적으로 했다간 반드시 미친다고 믿었던 것이다. 부다페스트까지 거슬러 올라왔어도 결국 그녀의 근원은 그 땅, 비스트리츠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거 안 해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바이올린.”
“별나게 뜯어말리네. 왜? 내 인형극은 보기 싫어? 질렸어?”
“그런 건 아닌데, 뭐, 그냥. 너는 살인이 상처가 아닌가 싶어서.”
“상처가 될 게 뭐가 있어? 태어나기를 악마로 태어났는데.”
그의 손끝이 가 닿은 것은 테이블 위에 모셔두었던 새까만 몸체를 가진 바이올린이었다. 테이블에 무게중심을 두고 걸터앉아 코드를 쥐고 자세를 잡고 각도에 맞추어 활을 들었다. 스피커를 타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의 손끝에서도 선율이 새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게 다 끝이었다. 그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끝을 선고하러 온 것이다. 구세대의 종말. 피할 수 없고 그저 수긍만이 가능한 그런 죽음을. 그토록 끔찍하게 아름다운 소리에 침잠하여.
“그냥 처음부터 수긍하면 되었던 거야. 아델하이트 가의 피와 나의 소리에 부여된 숙명에 고스란히. 그랬으면 나는 처음부터 행복했어. 괜한 고생을 했지. 그 여자 같은 구세대는 내가 만드는 선율 몇 가지로도 픽 죽어버릴 만큼 덧없고 가치가 없는 존재였는데.”
“너한테 의미 있는 가치가 뭔데?”
“사랑.”
오로지 그것 하나. 수면 위로 파문이 일어나듯이 제목을 알 수 없는 아리아가 잔잔히 건물 안을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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