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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디-R의 통화 기록
놀랍네. 연락을 먼저 해올 줄은 몰랐어, 테디 군. 몇 년 만이지? 4년 만인가? 음, 오래도 됐다. 메시지에 답장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세월이었잖아. 매정하네.
이만한 사안을 결정하는 데에 4년이면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답장이 없기에 매번 제안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알았는데. 망설이고 있었다니 의외네.
정말 예상도 못 했어?
설마. 가벼운 농담이야. 한동안 뉴스에도 나오지 않기에 고민하고 있구나, 하는 짐작은 했어. 그게 4년이나 걸릴 줄 몰랐을 뿐이지.
그만큼 어려웠어. 가족을 배신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야.
아버지는 쉽게 배신했잖아. 최소한 심적으로는.
심적으로는 가족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겉으론 아버지조차 배신해본이 없어. 알다시피 나는 5년 전 항쟁 당시에도 우리 조직을 위해서 싸우는 척이라도 했어. 내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나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데에 가담했던 그 모든 조직원들을 배신하는 건 꽤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어쩌다 너처럼 여린 애가 야쿠자 집안 같은 데에서 태어나서 그 고생을 하는지 몰라. ‘우리 가족이 항쟁에서 패배해 토벌당한 건 인과응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매번 놀라워.
하하,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고들 하잖아. 그런 거겠지.
그래도 항쟁에서 함께 살아남은 너희 형은 꽤 좋아했잖아. 갑자기 배신하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를 확인해도 될까?
배신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내가 여기 있어도 형이 구원받지는 못 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어. 나는 형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현상을 유지시키는 것만이 가능해.
너희 형은 너와 달리, 우리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던가.
의미도 없어. 복수한다고 항쟁에서 죽은 조직원들이 돌아와? 시작부터 파멸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복수가 남기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난 가급적 그걸 멈추고 싶어서 형의 곁에 있으면서 기회를 봐왔는데, 안 되겠어. 여기에 있다간 형을 구하기는커녕, 그전에 내가 무너져.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도 못 구해.
우릴 믿어?
안 믿어. 이래봬도 야쿠자로서 성장한 사람이라 사람의 얄팍한 호의 따위에 기대지 말라고 교육받았거든. 내가 믿는 건 너희와 나의 이해관계야. 너희는 교향악단―너희가 이 빌어먹을 테러리스트 집단을 은어로 그렇게 묶어 부른다고 들었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지? 설마.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우리는 수가 많아, 아무튼. 너흰 이 망할 교향악단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머리가 누구인지, 교향악단의 세를 불리고 있는 핵심 인물로 알려진 트로이메라이는 대체 누구인지? 난 그걸 알고, 따라서 너희는 나를 여기서 구하는 데에 협력하게 되어있어. 교향악단의 테러리스트들은 너희 회사에 스파이로 잠입할 수 있지만, 너희는 너희 히어로들을 교향악단에 스파이로 넣을 수 없을 테니까. 정신조작 능력자인 트로이메라이가 있는 한, 너희 동료를 정보원으로 교향악단에 심는 건 미친 짓이지. 그 동료마저 테러리스트로 넘어올 가능성이 높아. 정신조작에 당해서 말이야.
네 말이 전부 맞아. 우린 억지로 동료를 사지로 던져 넣지 못 해. 구색은 히어로거든. 그렇기 때문에 너 하나 구하자고 많은 인력을 투입해줄 수 없어. 이런 미적지근한 히어로들이어도 믿는단 말이지?
네 말대로 너희, 실상은 어떻든 구색은 히어로잖아, 많은 인력까진 바라지도 않아. 맞물린 이해관계, 구해달라는 현직 테러리스트, 거기다 너희 동료 존 수어드를 사살한 테러리스트 집단 출신. 너희가 아예 나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어.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그렇지만 조건 없이 목숨 걸어줄 의리가 있는 사이도 아니지.
어차피 내가 너희 회사로 넘어가면 대량의 정보가 넘어가는데, 더 한 조건이 필요해?
미라벨 샬레를 같이 데리고 나와. 우리 쪽 동료의 여동생이야. 거부하면 기절시켜서라도 데려와, 조건은 그게 다야. 미라벨 샬레를 데리고 나온다고 이 자리에서 확약하면 마중 정도는 나가지. 너희 두 사람 정도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루트도 찾아주고.
좋아. 어차피 미라벨도 나오고 싶어 하니까, 얘기는 잘 될 거야. 확실하게 약속해.
그럼 마지막으로 묻는데, 접선 장소는 어디가 좋아? 너희가 어디 숨어있는지 모르니까, 우리가 잡을 순 없잖아.
여기가 어디인지, 그건 아직 알려줄 단계가 아닌 것 같고. 접선 장소라면 생각해둔 데 있어.
신중도 하셔라. 어디로 마중 나가면 될까요, 테디 군?
제21지구, 간사이복지대학. 개인적으로 찾아야 할 게 있어서…….
그러려면 시간은 새벽이어야겠네, 사람 많으면 골치 아프니까. 뭘 찾으시게?
내 앞으로 온 편지 한 통.
2.
미라벨 샬레는 보드 게임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이곳에 발을 들인 후 생긴 취미였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으나, 예상보다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막중했다. 의사로서 맡겨진 직분도 중요했으나 그것을 뛰어넘어 테러리스트 집단의 아지트를 보호하는 결계사로서의 위치 또한 무시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친구를 구하고 싶어 억지로 발을 들인 정도였다. 그가 타고난 이능력은 결계이니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고, 의사로서 그들의 부상을 돌보는 일만 해주면 테러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미라벨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들어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미라벨의 결계 능력을 높게 샀다. 의사로서의 직분과 더불어 아지트를 지키는 최종 방어선으로서 그의 결계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받았다. 때문에 결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외출이 금지되었다. 조직은 그를 좀처럼 혼자 두려고 들질 않았다. 탈주 위험이 있다고 간주했는지. 미라벨은 그나마 자신을 감시하러 단 한 번도 트로이메라이나 천라오 같은 ‘높은 사람’들이 발걸음 한 적이 없음에 감사했다. 그를 감시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그가 ‘구하고 싶다고 생각한’ 친구인 나루카미 테츠야가 도맡아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미라벨을 보호하기 위해 자처하는 것 같았다. 의심을 사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미라벨의 동향을 실제로 그들에게 보고하기는 했겠으나 다른 사람이 감시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루카미 테츠야는 미라벨에게 불리한 행동은 보고하지 않는다. 미라벨을 겁주거나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일 또한 없었다. 보드 게임 취미는 나루카미 테츠야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붙었다. 테러에 가담하지 않는 두 사람이 아지트에 마주 앉아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뿐이었다. 체스, 트럼프, 고전 비디오 게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실력도 좋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 하시는지, 미라벨 아가씨. 수를 생각하시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십니다.”
사내는 체스 말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다. 미라벨 또한 다음은 자신이 말을 움직여야 하는 차례임을 알았다. 사내의 입에서 ‘시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체스판에 고개를 박을 것처럼 몸을 숙이고 앉아있던 미라벨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였다. 테츠야와 약속을 했다. 서로 따로 몸을 움직여 빠져나와서, 시내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미라벨은 외출이 전면 금지였으나 테츠야가 전날 아지트를 몰래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루트를 몇 가지나 표시하여 그의 휴대폰으로 정보를 전송해주었다. 시간에 맞추어 테츠야와 합류하려면 움직여도 한참 전에 움직였어야 했다. 다만 방을 나서려는 그 때, 단 한 번도 미라벨의 방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던 ‘높은 사람’ 하나가 떡하니 문 앞에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분명 나루카미 테츠야가 탈출 작전을 설명하면서 눈앞의 이 사내, 천라오는 지금 이 시간 상부에서 내려온 미션을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분명 작전이 어그러졌다. 위험한 건 지금 천라오와 대면하고 앉아서 한가하게 체스나 두고 있는 미라벨 본인이 아니었다. 잡혔든 잡히지 않았든 탈출 작전을 고안한 나루카미 테츠야다.
“체스는 잘 못 해서요. 사다만 뒀지, 매번 쉬운 보드 게임만 해왔거든요. 나루카미 군하고.”
“나루카미 테츠야 군? 하하, 그럴 만하네요. 이런 논리 게임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친구는 아니죠.”
미라벨은 마지 못 해 천라오를 따라 자신의 폰을 한 칸 전진시켰다.
“우린 어떻게 되나요? 나루카미 군은 잡혔어요?”
“무슨 질문을 하시는 건지 좀처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아 두 분께서 조직을 배반할 획책이라도 하셨나보죠.”
“…… 여긴 왜 오셨나요.”
“우리 명망 높은 샬레 가의 공주님께서 이 별 볼 일 없는 교향악단을 방문해주신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저희가 아직 제대로 대화 한 토막 나눠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서요. 마침 오늘은 시간이 비어서 찾아뵀습니다.”
천라오의 말이 움직여, 같은 칸에 선 미라벨의 나이트를 쓰러트렸다.
“잃는 게 두려우셨거든 테츠야 군을 말리셨어야죠.”
“제가 뭘 어떻게 해도, 사살인가요. 테츠야는.”
“나루카미 슈야 군이 반대하는데다가, 나루카미 형제의 이능력이 대단히 테러에 유리하기 때문에 사살까지는……. 보기보다 상상력이 과격하십니다, 아가씨.”
시계 바늘은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똑바로 돌아간다.
“그나마 슈야 군이 배반 행위에 가담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입니까. 테츠야 군은 좋은 형을 둔 덕분에 목숨은 부지 할 겁니다.”
천라오는 쓰러진 미라벨의 나이트를 느린 손길로 판에서 치워냈다.
“그러니 그렇게 죽을상까지는 하지 마세요. 아가씨께서 나루카미 테츠야와 영영 작별하는 순간은 아직 멀었으니까.”
3.
빌딩에 걸린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새소리가 길게 건물 사이사이를 메워나갔다. 건물과 건물이 나란히 올라간 틈새엔 그늘이 졌다. 사람 하나가 숨기에 괜찮을 만큼 짙은 그림자 속에, 사람의 얼굴 하나가 말갛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꽃샘추위라더니, 날이 부쩍 추웠다. 그가 아지트에 틀어박히기 직전엔 여름이었으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사계절이 네 번은 바뀌었을 세월 만에 바깥에 나왔다. 세월이 무색하게 주변 시가지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테디에게는 유리한 일이었다. 새로 올라간 건물이나 허물어진 건물이 있었더라면, 이만큼 길을 금방 찾기 어려울 뻔 했다.
시간에 맞추어 미라벨이 나오지 않았다. 테디는 그것이 굉장히 이상한 일임을 알았다. 시간 단위가 바뀌자, 도로를 다니는 차량 수마저 뜸해졌다. 탈출 작전이 들켰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었다.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이 작전은 히어로 측에 교향악단의 스파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했다. 테디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히어로 집단으로 투입한 스파이는 없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테디가 아는 범위 안에서의 일이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위치가 높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당연히 스파이 같은 핵심 정보를 접할 일은 거의 없었다. 탈출 작전의 조력자인 히어로 측에 스파이가 있다면, 당연히 정보는 교향악단 상부로 샜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라벨이 나오지 못 한 이유는 자명했다. 누군가가 미라벨 샬레의 행동을 막고 있다. 미라벨은 이능력부터 이능력이 아닌 능력치까지 무엇 하나 전투에 적합한 것이 없었으므로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막고 있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미라벨은 그 사람을 제치고 약속 장소로 나올 순 없었다.
의아한 것은 미라벨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밖에 나와 있다는 데에 있었다. 작전이 샜는데, 그의 탈출 루트만 막히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루트가 막혀도 미라벨과 테디 본인의 탈출 루트, 둘 다 막혔어야 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람. 그런 답답한 독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고 있던 옷에 달린 후드 끝을 잡아당기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한 시간 반……. 아지트로 돌아가거나 미심쩍지만 혼자 탈출을 이어가거나, 기로에 섰다. 접선 장소인 제21지구까지 이동하려면 현해탄도 건너야 하는 마당에 시간이 지나치게 늘어지면 곤란했다. 건물 외벽에 기대었던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겨 똑바로 섰다. 어쨌든 걸어야 했다.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선택하든 걸어야 했다.
“…… 26년 가르침이 무색하구나, 테츠야.”
목소리의 방향은 알 수 없었다. 돌아본 것은 본능이었다. 발화(發話)를 한 사람이 눈앞에 없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우선 자신의 뒤부터 확인하게 되어있었다. 시야는 그와 동시에 크게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고, 그 손이 미는 힘 때문에 저항할 틈도 없이 무게 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그의 몸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주변 환경이 일그러졌다. 새가 운다고 생각했던 소리가 가늘어지면서 시가지가 순식간에 녹았다. 이윽고 소리가 멈추자 그의 주변에서 익숙하다 생각했던 시가지는 사라지고 꽤 넓게 형성된 공터가 펼쳐졌다. 쓰러진 자신의 위로 올라탄 채,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윤곽이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정신조작 능력자, 트로이메라이.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하얀 머리칼이 도드라지며 목선을 따라 흐트러졌다. 트로이메라이의 어깨 너머로 똑바로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는 설령 가로등 불빛이 없었더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나루카미 슈야. 하나뿐인 그의 형이다. 그는 들고 있던 샤미센을 내려두고, 몸을 낮추어 앉아 테디―나루카미 테츠야와 깊이 눈을 맞추었다. 똑같은 색을 지닌 눈동자가 빚어낸 시야는 그만큼 깊이 맞물렸다.
“환각에 당하지 않는 방법 또한 내가 누누이 가르쳤던 기억이 나는데, 너는 항상 주의력이 부족해 문제구나.”
“…… 하하. 이거 어디서부터 환각이었어? 아지트를 빠져 나올 때부터?”
“사후 파악만 그렇게 빨라서 무엇 하겠니. 이미 늦은 것을.”
숨이 한 번 컥, 막혀왔다. 테츠야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트로이메라이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던 탓이다.
“육체노동은 특기가 아니라서. 형제간에 더 하실 이야기 있으시거든, 어서 끝을 내주시죠. 날이 춥네요.”
“로라 씨가 그러고 있으면 테츠야는 말을 못 해.”
“아, 이런, 실례. 이능력을 쓰면 곤란하니 목숨 줄 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요.”
트로이메라이가 자신의 남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깨물어 벗겨내는 동안. 숨통이 조금 트였다. 날숨을 한 번 거칠게 토해내고 나서야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나마 테츠야가 형에게 물을 수 있었다.
“그냥 보내주면 안 됐어?”
나루카미 슈야는 가늘게 웃었다. 테츠야가 기억하는 한, 그의 형은 그런 걸 유독 잘 했다. 특히 테츠야의 앞에선 힘든 내색 하지 않던 버릇 때문에 남들 앞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표정을 감추는 것에 능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테츠야는 반대로 미세한 표정과 눈빛을 읽어내는 재주만 좋아져갔다. 독심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형의 표정을 살피고, 눈빛을 살피고, 목소리를 살펴가며 그의 본심을 알아내려 애를 썼다. 자신을 형제로서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루카미 슈야가 처한 상황은 결코 나루카미 테츠야를 그토록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널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이야, 테츠야. 그렇지만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네가 날 배신하면 안 됐어. 다른 사람은 다 날 배신하더라도 넌 그러면 안 됐어. ……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고, 또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네가 안다면.”
이다음부터는, 조금 더 마음이 통하는 형제가 될 수 있다면 좋겠구나.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나루카미 슈야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일으켜 나루카미 테츠야의 시야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고운 손길로 내려두었던 샤미센을 들고, 트로이메라이에게 별다른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짧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루카미 슈야는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참, 저도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꼴이라 큰일입니다. 남의 형제 싸움에 껴서, 남의 말 안 듣는 동생 훈육이나 시키게 생겼다니 이것 참.”
숨은 한 번 더 턱, 막혀왔다. 트로이메라이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을 바꾸었다. 그와 몇 년을 알았건만 손이 직접 닿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걸로 체크 메이트였다. 마지막 발악으로 트로이메라이의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쥔 테츠야도 그건 알았다.
“무슨 감정을 어떻게 잘라내야 말을 듣게 되실까요, 테츠야 군은.”
트로이메라이의 정신조작의 발동 조건은 신체 접촉이었다. 그 손길이 닿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감정을 마비시켜 인격을 갈아엎는 것이 그의 이능력이 골자였고, 그것이 이 테러리스트 집단이 세를 불려온 원동력이었다.
“우선 연민부터 걷어낼까요. 그걸로 부족하면 동경을, 그 다음으로는 윤리 의식……. 무엇을 잘라내든 결과는 흥미롭겠네요.”
요는 당신이 더는 배신행위를 하지 못 하게 하는 거니까. 트로이메라이는 가볍게 웃고, 몸을 숙여 조그마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럼, 잘 자요. 이제 죽음과는 또 다른, 영원한 작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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