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0분이 남았다. 남자는 그에게 남은 시간을 그렇게만 일러주었다. 시간, 분, 초, 그런 구체적인 숫자는 의미가 없는 단위였다. 그는 수감된 이후 태어나 처음으로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스스로도 찌꺼기 같은 기분 한 조각 남지 않을 만큼 개운하게 잤다고 자부했는데, 남자는 그가 고작 네 시간을 잤을 뿐이라며 혀를 찼다. 그의 독방에는 시계가 없었다. 10분이 남았다는 말을 들어도, 체감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10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벽 한 구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전구는 어제부터 불안하게 깜박였다. 수명이 다 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토록 평온하게 시간을 흘릴 수 있는 것조차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전구가 한 번 크게 깜빡였다. 어둠은 몇 초 간 지속했고, 또 그가 고개를 조금 들자 새초롬하게 불이 들어왔다.
10분 후면 아서 홈우드를 만난다. 그의 의사는 상관없이 면회 일정이 잡혔다. 두 손으로 온전히 가려질 만한 크기의 창 너머로 그를 주기적으로 감시하던 남자가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거절할 기력도 없었다. 그는 알겠다는 말도 안 했고, 거절하겠다는 말도 안 했다. 그저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남자는 지레 그에게 거부권이 없음을 덧붙여 밝혔다. 그는 고개만 선선히 끄덕였다. 문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는 이후 아서 홈우드라는 이름을 기억해내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여야 했다. 흔한 이름이었다. 그가 아는 아서만 해도 너무 많아서, ‘홈우드’라는 성을 가진 사내를 걸러내기까지 상당한 기력이 필요했다. 그는 면회 당일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아서 홈우드가 그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학생임을 떠올렸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는 가까스로 손끝에 걸린 기억을 휘저어보았다.
생각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굳이 고르라면 호흡을 하는 것 정도가 가능할 따름이었다.
* * *
그는 아서 홈우드와 특별히 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너무 먼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아서 홈우드는 신세대 가문―그의 집안이 어떤 이능력을 대물림 하고 있었는지, 그것까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에서 태어난 보기 드문 구세대였고, 그는 구세대 가문―외가인 펠트 가, 친가인 크로우 가 어느 쪽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한 구세대 혈통―에서 태어난 보기 드문 신세대였다. 서로 기숙사는 같았지만 어울려 다니는 무리는 달랐다. 같은 학년, 같은 기숙사였으므로 알음알음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았지만 대화를 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대다수 아서 홈우드의 호의였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와 아서 홈우드의 첫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왜 미들네임이 해리엇이야?”
“…… 하, 할머니 성함, 인데…….”
“하하, 그렇구나. 좋은 이름이네. 화목해보이고.”
두 번째 대화는 세계사 수업 시간에 일어났다. 수업은 한 가을 오후 햇살처럼 늘어졌고, 그들은 때마침 필담 정도는 나누어도 들키지 않을 만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건 꽤 드문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수업에 늦어본 건 입학한지 2년이 지났던 그 때가 처음이었다. 대형 강의실은 선생보다 늦게 들어오면 앞자리로 헤치고 가기 좋지 못 한 구조였다. 통로는 교실 한 가운데에 나 있었고, 늦은 주제에 교실 한복판을 가로지르기까지 한다면 주목을 한 몸에 받기 딱 좋았다.
“너는 앞으로 가도 되지 않아?”
“너도 안 가잖아. 친구들 다 저기 있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 다들 쳐다보는 건 싫으니까.”
“나도 그래. 나 같은 사람은 집단 앞에 나설 때 적당히 몸 사릴 필요가 있어.”
그는 아서 홈우드가 마지막으로 적어낸 문장을 여러 차례 반복해 읽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아서 홈우드는 사릴 게 없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구세대에게 녹록치 않은 144지구라지만, 그는 다른 구세대와 달리 가문 대대로 신세대인 백작 가 출신이었다. 상류층 아이들과 무리 없이 어울렸고, 늘 쾌활해서 어울리는 무리들도 많았다. 적어도 사일러스 크로우의 눈에는 마냥 누구하고나 손쉽게 친해지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 같은 사람이 뭔데?”
그는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마지막 문장 밑에 의문형 문장을 적어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무례한 질문이었던 것 같아, 시선은 교과서에 실린 92지구 혁명 영웅 아슈타드의 얼굴로 내리꽂았다. 때문에 그는 아서 홈우드가 의문에 대한 대답을 적어낼 때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까지는 보지 못 했다.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라벤더 녹턴.”
수업이 끝나고 선생이 교단에서 물러갔다. 그것은 늘 아이들에게 좋은 신호탄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참았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정해진 자리에 붙어있던 몸들도 조금씩 유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무리를 짓고, 또 합류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아서 홈우드는 그의 답을 읽고 얼어붙은 사일러스를 두고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그 때 그가 이만 간다고 인사를 했던지, 하지 않았던지 그것까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사일러스 해리엇 크로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비 녹턴과 친구였던 그 자신이 아서 홈우드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 할 만큼 큰 죄책감에 싸였던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라비 녹턴은 아서 홈우드와 마찬가지로 신세대 집안에서 태어난 구세대였다. 특히 상류층 아이들 사이에서 라비 녹턴에게 가해지던 폭력이 아서 홈우드에게라고 가해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다만 라비 녹턴보다는 처세가 좋았기 때문에 그만큼 버티고 있었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음으로서 적당히 몸을 사릴 줄 알기 때문에. 신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구세대는 이미 세계정부에서조차 태반의 자리를 잃은 시대였다. 아서 홈우드는 학교에서 다름 아닌 생존하는 법을 습득하는 중이었다. 삶은 언제 어떻게, 어떤 뜻밖의 벽에 부딪혀 좌초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 후 그들은 졸업 직전까지 아무런 교류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아서 홈우드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고 사일러스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대화는 그가 라비 녹턴에 대한 차별 발언을 견디지 못 하고 사고를 쳤을 때에 벌어졌다. 신세대 학생들끼리의 푸닥거리는 단순히 치기 어린 행동으로 넘기기엔 지나친 부상을 불러왔다. 그나마 사일러스는 조금 나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싸움에서 이겼고, 상대보단 덜 다쳤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근신 처분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아서 홈우드가 펠트 가를 찾아왔었다. 졸업 직전의 봄이었고, 그는 아서 홈우드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예상을 미처 하지 못 한 참이었다.
아서는 굳이 ‘오래 있다’ 가지 않았다. 차 두 잔을 비워낼 만큼의 시간 동안, 이래도 괜찮은지 모를 만큼 평온한 대화만 오갔다. 왜 온 거냐는 질문은 결국 사일러스가 했다. 두 번째 잔의 차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 그러게. 왜 왔지?”
아서의 표정은 쓰고, 차는 달았다. 설탕을 너무 넣었나, 그런 터무니없이 평범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곧 졸업이고, 그런 일도 있었고. 고맙다는 말을 할 작정이었는데, 그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
“…… 라비를 좋아해?”
“녹턴하고는 말도 안 해봤는데, 기숙사도 다르고. 하지만 싫어하진 않아. 나를 연민하는 건 구차하지만 녹턴을 연민하는 건, 그러니까, 내가 가진 몇 가지 불행을 타인의 모습에서 멋대로 투영하고 연민하는 건 굉장히…… 쉽고 저열해. 하지만 그건 녹턴의 탓은 아니야. 내가 인간이 덜 된 거지. 말이 좀 복잡해졌는데, 결론은 녹턴을 싫어하진 않는다는 거야.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지만.”
“…… 차 더 마실 거면 따라줄게.”
“아냐, 괜찮아……. 고맙다는 말은 그냥 관둘게. 역시 좀 아닌 것 같아.”
사일러스는 그를 펠트 가의 대문까지는 배웅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엔 그들 사이에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다만 완전히 펠트 가를 나서기 전, 아서 홈우드가 사일러스 크로우를 한 번 돌아보았다.
“졸업하면 101지구로 간다고 했지?”
“일단은……. 우선 학교가 그쪽으로 붙었으니까.”
“그래. 거기선 행복했으면 좋겠네. 너나 녹턴이나.”
“너는? 졸업하면 어, 대학, 가긴 하겠지만……. 작위 문제? 그런 것도 있지 않아?”
“고다밍 경은 아마 내 동생이 하지 않을까, 그쪽이 신세대니까.”
“너도 앞으로도 녹록치 않겠구나.”
“어쩔 수 없지.”
그는 이후 살면서 그토록 황혼에 어울리는 미소를 본 일이 없다.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으니, 알아서 행복해지는 수밖에.”
* * *
"고다밍 경이 되었군요. 못 보는 사이에."
졸업 이후 아서 홈우드의 소식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101지구와 144지구는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은 족히 걸릴 만큼 지리상으로도 멀었고, 또 그가 언론에 얼굴을 비칠 만큼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서 홈우드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뉴스를 통해 사일러스 크로우의 수감 소식을 듣고 면회를 찾아왔다. 묻지 않아도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녹턴 가 몰살은 현재 144지구를 가장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이었고, 이후로는 30일 째 쭉 단독범으로 밝혀진 사일러스 크로우의 형량, 언행 하나하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아서 홈우드가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한 번은 사일러스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면은 사일러스에겐 충격이었고, 아서에게는 놀랄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가느다란 유리 한 장을 두고 마주앉았고, 사일러스는 아서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오랜만이라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네요. 인사 대신 불쑥 튀어나온 평가에도 아서 홈우드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 행복해지라는 요구가 그렇게나 무리한 요구였습니까, 크로우.”
“……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다고 했었죠. 그 말, 생략한 말이었다는 걸 오늘 되짚어 보고 알았어요. 정확하게는 ‘이렇게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늦었지만 깊이 동의해요. 이렇게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어요. 운명 같은 거예요, 홈우드. 이런 이능력으로 태어난 것, 혹은 이능력을 타고나지 못 한 것, 그런 부모를 두고 태어난 것, 혹은 좋은 부모를 두고도 지키지 못 한 것, 미래를 보는 것, 보지 못 하는 것, 아는 것, 모르는 것, 살고 죽는 것 전부 하나하나가 피할 수도 없고 엎을 수도 없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운명으로 맞춰져 있어서…….”
“라비 크로우의 죽음은 유감입니다.”
“…… 당신에겐 미안해요.”
“…… 제게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미안할 짓은 지금부터 제가 당신에게 할 제안입니다. 저는 당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꺼내러 왔으니까.”
어째서? 사일러스의 짤막한 질문 이후, 대화는 한참 이어지지 않았다.
“…… 여기서 썩어봐야 녹턴 가 몰살에 대한 속죄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사죄하고 싶은 건 ‘라비 크로우를 지키지 못 했다’는 사실이지, 고작 녹턴 가 몰살이 아니잖습니까.”
“나간다고 속죄가 되는 건 아니겠죠. 지켜야 할 라비가 없는데.”
“대신 더 많은 라비 크로우가 있을 겁니다. 당신 앞에도 있고, 제가 아니어도 무수히 많겠죠.”
그들을 구하는 일을 시작할 참입니다. 아서 홈우드는 조그맣게 혀를 찼다.
“아스트라이아 프로젝트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쉽고 저열한 일에 불과할지라도.”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디] 체크 메이트 (Ending) (0) | 2018.03.21 |
---|---|
[사약] 해시태그가 만든 사약 (0) | 2017.12.19 |
[A/H] Dear Darling (0) | 2017.10.28 |
[제임스] 실수. (0) | 2017.09.28 |
[웨이드] Cage Braker (0) | 2017.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