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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프라이어를 기다린 일이 있다. 내 짧은 인생 속 남은 가장 밋밋하고 독특한 기억 중 하나다. 해가 저물었고,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릿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공원 한편에 우뚝 서 있던 시계탑의 초침이 돌아가는 것이 그토록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너와 나 하나만 덩그러니 멈춘 시간 속에 남고, 초침을 비롯한 세상만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네게 무릎을 내어준 채 30분이나 벤치에 앉아 있게 된 경위는 그다지 운명적이진 않았다. 도로에서 쓰러지는 널 우연찮게 내가 발견했을 뿐이다. 이것을 필연으로 설명하려면, 헬레나 벤더가 고다밍가의 의뢰를 받고 나를 억지로 바깥으로 끌어냈던 사건부터 따져야 하니 한도 끝도 없었다. 만일 헬렌과의 게임에서 내가 이겼더라면, 내가 그날 널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랬더라면 억지로라도 아스트라이아의 사무실에 나올 일이 없었을 테고, 네 얼굴이나 이름 무엇 하나 내 일상으로 스며드는 일도 없었을 터다. 우연히 시내에서 마주치자마자 네가 널 알아보고, 그 순간 전원이 나간 것처럼 쓰러지는 널 내가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평생 연락할 일 없으리라 여겼던 워렌 프라이어의 연락처를 발굴하는 일은 더군다나 없었겠지. 전화를 걸었더니 프라이어는 운 좋게 런던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널 데리러 오겠다고 하기에 가까운 공원에서 보기로 했다. 프라이어의 설명으로는 네가 타고난 능력으로 인해 고질적으로 앓아온 기면증이라는 것 같았다. 예지가 길지 않다면 몇 분만에 깨어나기도 하지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는 모양이었고, 그땐 널 데리고 내가 사는 집에 간다는 발상을 못할 만큼 우리 관계가 지금보다 더 서먹하던 시기였던 탓에 프라이어가 오겠다고 해준 것만으로도 참 더없이 감사했더랬다.
그런 경위를 통해 나는 너와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남았다. 널 간신히 뉘일 만한 벤치에 뉘이고, 나는 친하지도 않은 옛 동창을 기다렸다. 시간은 정말 밋밋하게 흘러갔다. 뭔가를 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내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을진대, 담배를 물 수도 없었으니까.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릴 두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을 관찰하거나, 시간이 고스란히 얼어붙은 널 관찰하는 게 전부였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성격이 좋진 못했기 때문에 네 앞머리가 속눈썹까지 덮지 않도록 손끝으로 정리해 넘겨주면서, 꼭 너와 나를 한 번쯤 천칭에 올려두고 무게를 재보곤 했다. 나는 그때 그 순간, 신세대의 고충을 목도한 셈이었다. 심지어 그건 복수(複數)의 능력을 타고난 너의 고충이었다. 네 의지에 따라 예지를 조절할 순 없었기 때문에, 넌 늘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살아왔을 거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불시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 그날만 해도 내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오토바이에 치였을지 차에 치였을지 알 수 없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난 너보단 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비록 구세대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사회적 행동에 제약이 크고 권리는 신세대보다 못할지언정.
저울질은 매번 대충 자괴감으로 끝나곤 했다. 역시 나는 너처럼 뼛속까지 사람 좋은 성인은 될 수 없었고 그런 순간마다 매번 끔찍한 나를 발견하고, 널 건드리던 손길마저 거두곤 했다. 나는 아마 평생 널 넘어서진 못할 테지. 능력으로나, 삶으로나, 인격으로나 넌 처음부터 나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열등감마저 투명하게 사라질 만큼, 너와 나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네가 되고 싶었다. ‘너’라는 대명사에 네 이름이 얹히면 내겐 많고 별난 의미를 담은 말이 되곤 했다. 너처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고, 나의 내면이 아니라 주변을 세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너라면 내가 놓쳤던 많은 것들을 구했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내 자리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릴리 아멜리아가 죽진 않았을 거라고. 너의 다정함은 많은 사람을 구한다고. 나처럼 지나치게 성격이 꼬여 있지만 않다면 말이다.
다만 너의 경지는 너무도 까마득하게 멀어서, 어차피 네게 도달하지 못할 것 같으니 무언가가 얹혀 시야가 삐딱해진 사람들은 네 다정함 한 조각에 빌어 살아가보고자 다양한 위치를 빌려 네 주변 한 편에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두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 아서 홈우드. 네 아내 라벤더 크로우. 그리고 그날 널 데리러 왔던 워렌 프라이어.
프라이어는 40분 만에 도착했고, 넌 프라이어가 도착할 즈음 깨어났다. 그때 프라이어는 내게는 그다지 인사다운 인사를 건네진 않았다. 그저 깨어난 너를 보고, 잘 잤느냐는 인사를 하고 다정히 살펴주었을 뿐이다. 그게 내게는 도무지 이상한 광경이어서 후에 그와 재회했을 때 물었다. 사일러스 크로우에게 안식의 밤이 존재하느냐고. 그러자 프라이어는, 그런 대답을 했다.
“사람은 보통 그럴 때 다정한 인사 같은 걸 바라게 되지 않아?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뭐 대단한 걸 바라겠어. 바깥에서 드는 미세한 빛이나, 옆에서 잡아주는 손길 같은 걸 바라겠지. 사일러스의 다정함이라고 한없이 샘솟는 건 아닐 테고. …무엇보다 난 그런 걸 바라는 사람이라서, 내게 늘 빛이고 손이고 다 내어주는 사일러스를 좋아하는데. 넌 아니야?”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다. 남들 못지않은 고충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다정한 너 또한 아름답고, 내가 가진 어휘력으로는 그 강인함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늘 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습게도 어려서부터 꺼려했던 워렌 프라이어가 그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그럼에도 꽃에겐 자생을 위한 물이 필요한 법이다. 네가 그때까지 꺾이지 않았던 건 프라이어를 비롯해 너를 살아가게 하는 환경의 힘이 있었을 터다.
요컨대 내가 너를 마르지 않게 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서 네게 받아왔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다면 깨어난 너에게 몇 번이고 인사를 해주고 싶다. 잘 잤는지, 괜찮은지. 세상이 가진 모든 불행의 조각을 또 한 번 엿보고 온 너에게 그런 걸 상기하고 싶었다. 악몽이 네게 어떤 지옥을 보여주었든 세상은 아직 무사하다고. 더불어 막연히, 네가 목도한 불행을 지울 수 있는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선명한 색채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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